늦가을로 접어들어 제법 쌀쌀해진 새벽 공기를 가르며 가을철로 미뤄두었던 청량산으로 향한다. 청량산은 풍광이 수려하고 웅장해 소금강으로 불려왔는데, 옛 선비들은 일생에 한 번은 꼭 가봐야 할 심신수양처로 꼽았다고 한다. 거리상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만큼 그 모습이 가장 아름답게 보일 가을단풍 시기를 맞춰 찾았는데, 때마침 청명한 날씨속에 온 산이 추색으로 물들어 그 산세가 더욱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산행일자 : 2018년 10월 27일 (토)
△산행코스 : 안내소→축융봉→산성→입석→응진전→김생굴→자소봉→장인봉→금강대→안내소
△산행거리 : 12.1km (GPS측정 기준)
△소요시간 : 8시간 17분 (휴식/사진촬영 1시간 34분 포함)
앞선 선답자들의 산행기를 봤을 때 청량산의 전체 조망을 보기 위해서는 축융봉에 올라야 했다. 조금 부담이 되지만 먼저 축융봉에 오른 다음 입석으로 내려와 다시 청량산의 나머지 봉우리를 오르는 코스로 진행하였다.
신선한 기운이 감도는 가을 아침.. 청량산박물관에 주차를 하고 청량산 도립공원의 청량지문으로 들어선다.
청량지문에 들어서자 곱게 물든 단풍들 사이로 먼저 퇴계선생 시비가 눈에 들어온다.
청량산은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과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1495~1554), 그리고 그들의 문인과 후학들이 호연지기를 갈고닦은 ‘인문의 산’이라고도 했다.
'사람들은 글읽기가 산 유람과 같다지만
이제보니 산을 유람함이 글읽기와 같구나
공력을 다했을 땐 원래 스스로 내려오고
얕고 깊음 아는 것 모두 저로부터 말미암네
앉아서 피어오르는 구름 보며 묘리를 알게 되고
발길이 근원에 이르러 비로소 처음을 깨닫네
높이 절정을 찾아가길 그대들에게 기대하며
노쇠하여 중도에 그친 나를 깊이 부끄러워하네'
思無邪(사무사)..‘생각에 사악함이 없음’을 뜻하는 공자의 말로, 퇴계 이황 선생이 좌우명으로 삼았던 글귀 중 하나다.
축융봉 들머리는 청량지문 오른쪽에 있으며, 이정표 상 축융봉까지 거리는 2.9km이다.
약 10여분 비탈길을 오르니 능선 오른쪽에 바위전망터가 있다. 전망터에서 건너편에 아침 햇살로 빛나는 산등성이가 보이고, 산아래에는 박물관이 위치한 광석마을을 말발굽처럼 감싸고 흐르는 낙동강이 내려다 보인다.
오늘은 구름은 많지만 대기는 깨끗한 날씨다.
아침나절 긴 산그림자와 함께 곳곳에 구름으로 만들어진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가파른 등로를 따라 좀 더 오르니 같은 방향으로 조망이 열린 전망대가 나타나고.. 멋진 조망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능선에 닿으며 길은 비교적 완만해지고..
노랗게 물든 숲에서 낙엽을 밟으며 걷는 발걸음이 즐겁기만 하다.
능선 끝에 이르러 눈앞에 우뚝 솟은 암봉을 바라보고 설치된 계단을 따라 오른다.
축융봉 코스는 울창한 숲과 함께 양호한 등로 상태와 촘촘히 설치된 이정표에 다시한번 놀랐다.
축융봉 계단을 올라 먼저 왼쪽 암봉에 다가가 주변을 조망해 본다.
지나온 능선을 내려다 보니 노랗게 물든 활엽수와 푸른 소나무들이 양탄자를 깔아 놓은듯 조화롭게 펼쳐있고
그 뒤로 높은 산등성이를 타고 형성된 고랭지 농경지들이 이색적으로 다가온다.
그 왼쪽으로는 크고 작은 산들 사이로 안동호의 물빛이 햇빛에 반짝인다.
축융봉은 경북 봉화군 명호면과 안동시 도산면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청량산 12봉우리 중 하나다.
조선시대 유산기에는 ‘연대의 남쪽에 세 돌이 우뚝 서 있는데, 여러 봉우리 가운데 가장 높이 솟은 것이 축융봉(祝融峰)이다.’ 라고 했다. 주변에는 밀성대에서 축융봉을 거쳐 구축된 공민왕산성이 있다.
구름이 햇빛을 가리고 있는 점이 아쉽지만 청량산의 전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멋진 축융봉의 조망이다.
조선시대 이전에는 불교문화의 영향으로 봉우리 이름도 보살봉, 의상봉, 반야봉, 원효봉 등으로 지어졌었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와 유교식으로 고쳐졌는데,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였던 신재 주세붕(1495~1554)이 1544년 최초로 청량산 유산기(遊山記)를 쓰면서 현재 불려지는 청량산 12봉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구름이 지나가며 햇빛이 드러나기를 기다려보지만 잠시 틈새만 보일뿐 연이은 구름이 기약없이 몰려든다.
청량사를 내청량, 응진전을 외청량이라 하며, 연꽃처럼 피어난 열 두 암봉의 꽃술에 해당하는 중심에 자리한 것으로 비유한다.
봉우리 이름은 모두 유교식으로 바뀌었지만 문수신앙에서 연유한 ‘청량산(淸凉山)’이라는 이름은 그대로 전해진다.
암봉으로 솟은 축융봉의 바람이 무척 차갑다.
잠시 구름이 걷히기를 기다리다 진행방향의 산성길을 향해 축융봉을 내려선다.
삼국시대부터 군사적 요충지로 영토의 각축장이 되었던 곳.. 장구한 역사의 흔적을 밟으며 성곽을 따라 내려선다.
산성길을 걸으며 건네다 보이는 청량산 경관이 무척 아름답다.
가을 청량산을 찾는다면 꼭 걸어봐야 할 길이다.
만추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키는 청량산성길..
단풍철을 맞아 많은 인파로 붐비는 청량산쪽에 비해 조용하고 여유롭기만 하다.
밀성대는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청량산으로 들어와 산성을 쌓고 군사를 훈련하던 곳으로 그 흔적이 아직도 완연한데,
명령을 따르지 않는 군졸이나 백성들을 밀어서 처형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장소라고 한다.
아스라이 이어지는 계곡 사이로 그 때의 그 한맺힌 울림이 전해오는 듯..
예나 지금이나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그 피해는 오롯이 백성의 몫이 되니 자고로 리더를 잘 만나야 백성이 편안하다.
밀성대를 한바퀴 돌아보고 산성 입구로 내려선다.
밀성대를 지나 산성입구로 내려서는 길도 계속해서 가을 분위기에 빠져들게 하는 아름다운 풍경이 이어진다.
가을숲이 아름답게 물들었지만, 사실 이곳에서는 붉은 단풍은 거의 보이지 않았는데 산성입구로 내려오니 단풍나무들이 보인다.
산성입구로 내려와 잠시 휴식과 함께 점심을 먹고 이어갈 산행을 준비한다.
자소봉을 오르기 위해 입석에 도착하니 많은 단체객들로 왁자지껄하다.
붐비는 등산객들 틈에서 서둘러 응진전으로 향한다.
응진전은 부처님의 제자인 16나한을 모신 전각이다. 청량사를 창건했던 원효대사가 머물렀던 암자였으며, 내부에는 석가삼존불과 16나한이 봉안되어 있고, 공민왕의 부인인 노국대장공주의 상이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청량산에서 가장 경관이 수려한 곳이며, 왼쪽 벼랑 위에는 작은 바람에도 흔들린다는 동풍석(動風石)이 얹혀 있다.
금탑봉 중간에는 청량산의 봉우리와 기암절벽의 장관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경유대, 어풍대, 풍혈대 등 여러 대(臺)가 있다.
청량사는 663년(신라 문무왕 3년)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연화봉 기슭 열두 암봉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
본래 매우 큰 절이었으나 조선시대 억불숭유 정책의 영향으로 피폐해졌다고 한다.
금탑봉(金塔峯) 중턱에는 신라 말 대학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미상)에 관한 유적이 남아 있는데, 총명수는 최치원이 마신 뒤 더욱 총명해졌다는 전설이 있다. 이 때문에 청량산에 유람 온 선비들은 대부분 이곳에 들러 총명수를 마셨다고 한다.
시간상 청량사 관람은 다음으로 미루고 곧바로 자소봉으로 향한다.
김생폭포는 천길 높은 곳에서 쏟아지는 흰 물줄기가 장관이라고 하는데, 가뭄 탓인지 지금은 물줄기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통일신라시대의 서예가 김생(金生, 711~?)이 이 굴 앞에 암자를 짓고 10여년간 서예를 연마하여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청량산의 모습을 본뜬 독특한 서체인 ‘김생필법(金生筆法)’을 확립하였다고 한다. 이로 인해 송나라 사람들로부터 해동서성(海東書聖)으로 불리게 되었다.
명성에 비해 김생의 삶에 대해서는 전설처럼 전해질뿐 구체적인 기록이 드물고 남아 있는 필적도 거의 없다고 한다.
경일봉 허리를 가로지르던 등로를 지나고 계곡을 건너면서 자소봉 길은 가파른 능선으로 이어진다.
혼잡한 철계단에 올라서니 사람의 발길이 닿기 어려워 보이는 암봉이 뾰족하게 솟아 있다.
정상석이 세워진 곳은 맞은편 너른 암반위이지만 이 봉우리가 자소봉 정상(872m)인 듯하다.
정상석에 불교식 이름인 ‘보살봉’이라고도 새겨져 있다.
역시 정상인증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잠시 기다린 뒤 정상 모습을 담아본다.
자소봉 정상에서는 남북으로 조망이 트이는데 북쪽에는 문명산이, 남쪽에는 축융봉이 솟아있다.
자소봉을 내려와 장인봉으로 향하는 능선에서 돌아보니 암봉 위의 멋진 소나무가 눈에 띈다.
붓끝을 모아 놓은듯 하다 하여 탁필봉이라는데, 기울어진 암봉의 모습에서 뛰어난 필적을 연상했을 법도 하다.
역시 철계단으로 암봉에 오르니 정상에 멋진 소나무들이 반긴다.
정상인증을 위해 순서를 기다리는데 뒤이은 단체객들이 순서를 무시하고 단체 인증을 하려한다.
소수를 외면하는 단체객들의 자기밖에 모르는 무분별한 행동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찔한 절벽 끝에서 소나무 가지 사이로 연화봉 능선을 바라보고 연적봉을 내려선다.
길은 잠시 평이한 능선길로 이어지고, 조망이 트이는 곳에서 가야할 장인봉을 바라본다.
V자의 협곡인 뒷실고개를 지나서 이어지는 자란봉과 선학봉은 정상 표식 없이 우회하여 지나친다.
자란봉을 지나며 또 하나의 청량산 명물인 하늘다리를 만난다.
자란봉과 선학봉을 연결하는 청량산 하늘다리는 2008년 5월 봉화군에서 설치한 길이 90m의 산악현수교이다.
안내문에 국내에서 가장 긴 산악현수교량이라 쓰여있지만 10년이 지나며 그동안 전국에 출렁다리가 많이 생겼으니 지금은 그 위치가 많이 달라졌을 듯하다.
하늘다리를 지나면서 산객들이 부쩍 늘어나고 장인봉 철계단에서는 한동안 정체가 이어진다.
긴 줄을 무시하고 앞다퉈 오르려는 사람과 이를 제지하는 사람들 간 고성이 오가기도 하여
즐거워야 할 주말 산행이 짜증나게 되는 또 하나의 불미스런 상황이 연출된다.
청량산의 주봉이자 최고봉으로 동서로 이어진 청량산의 주능선 맨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정상석의 글씨가 김생의 필체를 조합한 것이라니 조금이나마 그 면모를 접해볼 수 있겠다.
청량산은 옛부터 안개가 많은 곳이라는데..
아마도 정상에서 운해가 깔린 광경을 목격하고 운치있는 경관에 더욱 감명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정상에 올라 / 주세붕
청량산 꼭대기에 올라 두 손으로 푸른 하늘을 떠받치니
햇빛은 머리위에 비추고 별빛은 귓전에 흐르네
이래로 구름바다를 굽어보니 감회가 끝이 없구나
다시 황학을 타고 신선계로 가고 싶네
정상에서 공원입구 방향으로 조금 내려서니 전망대가 나오고
발아래 굽이도는 낙동강 줄기가 내려다 보이는 시원한 전경이 펼쳐진다.
정상에서 공원입구로 내려오는 코스가 상당히 가파르다.
수없이 많은 계단을 지나게 되니 가급적 이 코스로는 오르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다.
청량산의 지질구조는 운반작용을 통해 퇴적된 역암(礫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긴 세월 풍화작용으로 자갈 입자가 빠져나가 바위 사면에 벌집처럼 구멍이 생기는 타포니 현상이 발달되어 있다.
한동안 고도를 낮춰 722봉의 전망대에서 오후의 햇살에 빛나는 장인봉의 우람한 자태를 바라본다.
서북쪽으로는 낙동강을 경계로 만리산과 풍락산이 마주솟고 오른쪽 멀리 문수지맥으로 이어지는 문수산이 보인다.
다시 전망대를 내려와 곱게 물든 단풍과 주변 산세를 감상하며 하산한다.
금강굴은 퇴계의 급문제자였던 금난수가 공부한 바 있으며, 정안이라는 승려가 수도하며 머물렀던 곳으로 수십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아늑하고 고요하여 수양할 수 있는 장소로 적격라고 한다.
“험로를 거듭 지나 마침내 금강굴에 도착하니, 굴에 조그만 암자가 있고 암자 밑은 절벽이었다. 시렁처럼 얹힌 바위가 곧 기와지붕을 대신하였고 층계 구름이 고요히 일었다.” (김득연,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 1579」)
청량산에 붉은 단풍나무는 많이 보이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노랗게 물든 나뭇잎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하산 중에 할배할매송, 여여송(如如松) 등 이야기가 있는 소나무들을 만나는데, 조금은 지어낸 느낌이 들지만 이야기와 함께하니 더 정감이 간다. 삼부자송은 인근에 화전을 일구며 살던 어느 부부가 세 갈래로 뻗은 특이한 소나무를 발견하고 자식을 바라는 열망을 지극정성으로 빌어 쌍둥이 아들을 얻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소나무라고 한다.
단풍으로 화려하게 물든 청량산의 멋진 산세와 함께 자연을 사랑하고 그 멋을 즐겼던 옛 선인들의 향기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산행 중 접했던 조선 후기의 문신 권성구의 싯구절로 산행 후기를 마친다.
금강산 좋다는 말 듣기는 해도 여태껏 살면서 가지 못했네
청량산은 금강산에 버금가니 자그마한 금강이라 이를 만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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